신당동은 떡볶이만 유명한 게 아니다 | 한양도성 따라 떠나는 서울 역사여행

2020. 9. 21. 07:00도성친구들2기

국립극장 N서울타워 구간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막상 역사공부를 하려고 하면 막막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설민석 선생님처럼 될 수 있는 거지? 그 양이 너무 방대해서 공부를 시작함과 동시에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이 든다.

이럴 때 좋은 대안은 여행을 통해 역사 공부를 하는 거다. 경험상 여행은 역사의 사막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좋은 이정표가 된다. 예를 들어 경주에 가면 신라시대를, 광주에 가면 근현대사에 대해 '급' 관심을 가져보는 거다.

서울에는 그런 역사 이정표가 무수히 많다. 외국인에게 인기 많은 경복궁, 창덕궁 같은 궁 시리즈부터 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의 문 시리즈까지 너무나 유명한 문화재가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이 모든 걸 담고 있는 그릇이 있으니 그것이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곽이다. '서울=한양'이라고 생각한다면 한양도성의 면적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옛날 한양의 면적은 지금 서울의 1/30~1/40 수준이다.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한양도성을 하루 만에 걷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하고 전쟁을 겪어왔다. 그 가운데 한양도성도 계속해서 부서지고 복원되었다. 1396년 처음 축성됐을 때와 2020년 현재의 모습이 꽤 달라졌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도성이 품고 있는 옛이야기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도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순성놀이라고 한다. 순성을 하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시대의 역사가 보인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개인적으로 순성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거리두기가 완화될 텐데 그때를 위해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알고 걸으면 더 많이 보이는 장소가 한양도성이니 말이다.

 


신당동은 떡볶이만 있는 줄 알았지 뭐야 (한양도성 흥인지문구간)

광희문

한양도성은 6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그중 흥인지문구간에는 광희문이 있고, 그 문 밖으로 보이는 동네가 신당동이다. 서울의 지형은, 아니 정확히는 한양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서 물이 서→동으로 흘렀다. 동쪽에 위치한 광희문은 그 근처로 물이 지나가는 수문이 있어 이곳을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광희문에는 또 다른 별칭이 있다. 도성 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많이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린 것이다. 한양도성에 있는 사대문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이 왕래를 하고, 사소문 중 일부로는 시체를 내보냈는데, 그중 광희문에 유독 장례 행렬이 잦았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광희문 바깥은 노제 장소가 되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주는 무당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이름이 신(神)당리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현재는 신을 다른 한자로 바꿔서 신(新)당동으로 부른다)

지금도 몇몇 남아있는 철학원을 통해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처럼 무당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철학원에서 재미 삼아 점을 볼 수는 있다. 신당동은 떡볶이만 먹으러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런 역사를 아니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다음에 갈 때는 광희문을 의미 있게 살펴보고 동네 구경도 천천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Ω 흥인지문구간

  • 구간: 흥인지문 ~ 장충체육관
  • 거리: 1.8km
  • 소요시간: 약 1시간

 


내가 고종황제였다면?! (한양도성 숭례문구간)

구러시아공사관

한양도성의 남서쪽은 숭례문구간이다.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를 이른다. 이 구간은 성곽의 흔적이 거의 없어 순성을 하려면 사전학습이 필요한 곳이다.

숭례문구간에는 정동공원구러시아공사관이 있고, 이곳에서 고종의 아관파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아관은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인 아라사의 공관이고, 파천은 임금이 피신을 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고종이 일본의 압력을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말한다.

아관파천 1년 전에는 을미사변이라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고종은 신변에 큰 위협을 느꼈고,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에 있으면 아무리 일본의 힘이 막강하여도 그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관파천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본인의 힘이 아닌 또다시 외세(러시아)를 이용해 외세(일본)를 물리치려 했다는 비판과, 당시 고종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좀 더 알아야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가 고종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아관으로 피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구러시아공사관은 탑만 남아있고 나머지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사라지고 없다. 건물이 있던 터는 정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예전에는 무심코 봤던 단순한 탑이었지만 앞으로는 이곳을 지날 때 고종이 했던 고민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Ω 숭례문구간

  • 구간: 백범광장 ~ 돈의문 터
  • 거리: 1.8km
  • 소요시간: 약 1시간

 


광해군은 폭군일까 성군일까? (한양도성 백악구간)

백악구간

조선시대 임금 중 이름이 '군'으로 끝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불명예스럽게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난 왕은 이름 뒤에 '군'이란 호칭이 달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이 두 왕에게 좋은 기록이 남았을 리 없고, 대부분은 이들을 폭군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폭군의 이미지로만 기억되기에는 잘한 것이 꽤 많은 왕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해졌고, 요즘은 실리를 중시한 광해가 성군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광해와 연관된 장소가 한양도성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광해를 끌어내리고 왕이 된 인조의 쿠데타 세력, 즉 인조반정군이 도성 바깥에서 도성 안으로 진입할 때 창의문을 이용한 것이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백악구간의 시작점이며, 앞서 신당동 이야기할 때 나온 광희문과 같은 한양의 4소문이다.

인조반정군은 창의문을 통과해 그대로 창덕궁으로 향했다. 체포된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반란에 성공한 인조는 왕위에 올랐다. 약 100년 후, 인조의 후손인 영조는 창의문의 문루를 다시 세우며 현판에 어떠한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인조반정의 공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었다.(이 현판은 현재도 그대로 걸려있다)

창의문 편액

Ω 백악구간

  • 구간: 창의문~혜화문
  • 거리: 4.7km
  • 소요시간: 약 3시간

 


한양도성의 6구간 중 3구간, 흥인지문/숭례문/백악구간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알아보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이 세 구간을 가장 먼저 순성해 볼 생각이다. 예전에는 그저 예쁘다, 아름답다는 감성적인 접근만 했는데, 이제는 한양도성이 역사적 의미와 함께 다르게 보일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한편 올해도 8번째 한양도성문화제가 작년에 이어 진행된다. 대부분의 행사가 비대면/온라인으로 진행될 것 같고, 코로나로 인해 프로그램이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 공식 계정을 팔로우하면 이번 문화제에 대한 최신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꼭 팔로우하길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순성에 관심이 생겼다면 순성 유의사항을 꼭 숙지하시고 한양도성을 방문하였으면 한다. 순성 시에도 마스크 착용과 개인위생은 철저히 지켜야 하며, 주택가에서 조용히 하기/쓰레기 버리지 않기 등 기본적인 예절 또한 갖춰야 함은 당연하다. 코로나가 진정돼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한양도성을 걷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낙산 성곽길

더보기

<저작권 표기>
사용된 성곽과 소문 사진은 서울한양도성 사이트에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구러시아공사관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다운 받았으며 CC BY-SA 3.0 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