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자 베트남 만다린 택시: 그랩 믿다가 여행 중 똥줄 탄 사연

2018. 9. 14. 09:30세계여행 헬로우/베트남 종단 프로젝트

2-3년 전인가 첫번째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가장 먼저 검색했던 것은 공항에서 시내가는 방법이다. 세계 모든(?) 공항의 일관된 법칙이 있다면 외국인 등골 뽑아먹는 등골 브레이커 택시기사들이 존재한다는 점.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인천공항에서 마포까지 택시비로 40만원을 받은 기사님이 있다고 하니, 쩜쩜쩜... (그걸로 소고기라도 드셨다면 다행)

아무튼 예전 그 당시, 베트남 여행 관련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봤던 글은 '베트남에선 무조건 비나선!' 이라는 거다. 비나선이 뭐지? 아마도 현지에서 1등 택시회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2등이라고 할 수 있는 만다린 택시도 비나선이 정 안 잡히면 타라고 할 정도이니 이 정도면 닥치고 비나선이라 할 수 있겠다. 여행 선배님들의 조언대로 이 날 이후 내 머리속에 택시=비나선으로 굳어졌고, 그 이후로는 뭐.. 만다린은 아예 나한테 불량택시가 되어버렸다. (만다린 미안 - 이제와서)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베트남을 여행하는 지금, What's happening?! 비나선이고 나발이고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되어버렸넹??? 베트남에서 모든 길은 그랩으로 통할지니.(만사그랩형통) IT 기술을 등에 업고 '공유 경제'라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여기도 그랩 기사, 저기도 그랩 기사, 온 동네에 그랩 기사님들이 있는게 아닌가.

개인적인 여행 취향은, 뭐랄까. 여행하면서 IT 전사가 되지말자 이지만 그랩 서비스를 한번 써보니 이거 참나... 정말로 넘나 편하다... -_- 손짓 발짓 해 가며 목적지를 말할 필요가 없고,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조바심내며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아도 되잖아! Oh, WOW.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노미터 흥정 택시들은 아예 상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랩, 너 정말 초대박이야)

상황이 이렇다보니 베트남 기차여행 중인 내 입장에서는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또 반대로 숙소에서 기차역까지 이동을 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말 그대로 Just Grab 이다.) 일반 택시들이 전부 다 속임수를 쓰고 미터를 켜지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거니까. 나로서는 이왕이면 즐겁고 싶은 여행에서 요금 사기를 당할 확률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오늘 아침, 후에(Hue)의 숙소에서.

오전 10시 방에서 짐을 챙겨 나와서 체크아웃을 했다. 기차 시간은 아직 1시간 후라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로비에서 숙소 비용, 미니바에서 먹은 맥주, 물 값을 계산하니 스탭이 몇 마디 묻는다.

스탭: 너 이제 어디가냐
나: 이제 다낭으로 감.
스탭: 글쿠나. 그럼 기차역으로 가냐
나: 응
스탭: 뭐 타고?
나: 그랩
스탭: 응, 조심히 잘가
나: 안녕, 고마웠어.

쏘 쿨!!!!!!! 이 신박한 대화 좀 보소. 고수 여행자 스멜 좀 났니??? 완벽한 컨버세이션에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숙소 로비를 나왔다. 그리고 그랩택시가 날 발견하기 쉬운 길가로 걸어나갔다.

그랩 앱을 켜고 목먹지는 후에 기차역으로 설정. 그리고 호출! 그런데 도통 그랩이 잡히지 않는 거 아닌가. 아직 기차 시간은 30분 정도 더 남아있어서 조급하지는 않지만...

그랩 기사를 다시 호출. 안 잡혀서 또 다시 호출. 계속 10분 넘게 반복하는데 택시가 잡히질 않는다. 아놔, 왜 이런거지 맵을 좀 확대해보니 택시들이 도통 보이지 않더라. 그나마 몇 대 있는게 기차역에 있는데 무슨 3층 석탑마냥 꿈쩍하질 않는 상태.

기차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똥줄이 함께 타들어 가는데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택시를 그냥 잡자니 미터 사기가 겁나고, 숙소 로비에 가서 콜택시 불러 달라고 하자니 아까 쿨한척 코스프레 했던 내 자신이 생각난 것이다.

1분동안 땡 볕에서 베트남 모자 쓴 채로 서 있다가 사기 당할바엔 쪽팔리고 말자 라는 마음으로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 스탭이 놀란 표정이다. 쏘쿨 진동하며 나갔던 사람이 10여분 만에 노쿨 하며 들어왔으니 말이다.

뭐 이제는 할 수 없지. 나는 멋적은 목소리로 '콜 택시 플리즈'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스탭이 '오, 알았다'면서 금새 택시 한대를 부른 후 나와 같이 길가에서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그렇게 내게 다가온 택시는 그린색 계열의, 나에게 이유없이 평소에 무시당했던 만다린 택시!!! ㅋㅋㅋㅋㅋㅋ 이거 참, 그랩이 최고라며 그랩 그랩 하다가 만다린 택시타고 기차역으로 가는 상황이라니.

혹시나 했던 미터사기는 없었고 시작부터 아주 낮은 요금으로, 그리고 천천히 요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기사님이 엄청 친절하신거 아닌가? 베트남의 개인 그랩기사들이 대부분 무뚝뚝한데 반면 이 기사님은 시종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놔 -_- 괜시리 더 미안한 상황)

베트남에서 일반 택시를 정말 오랜만에 타봐서 가는 내내 요금이 얼마가 나올까 궁금했다. 친절하시고 콜택시니까 그랩보다는 더 나오겠지 생각했는데, 그랩 잡으면서 표기되었던 예상액하고 거의 똑같이 나오더라. 후에 여행자거리 끝머리 내 숙소에서 후에 기차역까지 나온 총 요금은 34,500동. 딱 좋은 요금이다.

(여담으로, 500동은 우리나라 돈으로 25원으로 베트남에서도 아주 작은 단위이고 여기서도 받기 힘든 지폐이다. 나는 기사님께 정확하게 500동까지 맞춰서 드렸는데 기사님 얼굴을 보니 '흠좀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다린 택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기차역에 도착해서 후에 -> 다낭까지 잘 올 수 있었다. 오늘 배운건 그랩이 모든 도시마다 날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결국은 신문물에 열광하다가 원래의 터줏대감에게 한방 제대로 먹은 날이 아니었나 싶다.

▲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도어 투 도어 시스템이다. 모닝 택시가 기차역 안, 아니 심지어 철로 바로 앞까지 와서 대기를 하기도 한다. 모닝이니까 가능한거지? (Ga Vinh / 빈 기차역)
▲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가는 설국열차가 하루 5번 있다. (Ga Thanh Hoa / 탄호아 기차역)
▲ 다낭 기차역 앞의 만다린 택시들.
▲ 탄호아 기차역에도 만다린이 꽉 잡고 있다.
▲ 오늘 나를 후에 기차역까지 잘 데려다주신 만다린 아저씨. 감사합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