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역할과 책임)과 군대문화의 묘한 관계

2016. 1. 22. 12:00칼퇴의품격 일상/칼퇴 생각

작년 이맘 때 나는 새로운 팀으로 배정받아 설레여 하고 있었다. '새해'와 '새 팀'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함 기대감, 잘해봐야지 하는 직장인 5년차의 새삼스런 파이팅은 덤!

새해에는 늘 그렇듯 조직개편이 있기 때문에 팀에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중 하나가 R&R 설정이다. 역할(Roles)과 책임(Responsibilities)을 명확하게 하는건데 개인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함이 목적이다.

우리팀의 윤모과장님은 R&R 매니아였다. 한번은 회의를 하는데 회의 자체를 즐기는 듯 보였다. 자신의 팀원들과 R&R 정립 회의를 하는것 자체가 뿌듯한가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이걸 왜 하는지에 대한 본질은 잊은 채 회의시간이 3~4시간이 넘어가곤 했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않아 별도로 '워크숍'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과파티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겨우겨우 R&R을 정했다고 치자.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속적인 관리가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계속 변하는데 회사의 팀장급 이상 리더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것 마냥 '한번' 계획하고 만다. 실제로 우리팀도 연초에는 워크숍까지 열어가며 마라톤 회의를 했지만 그 후에는 바뀐 상황에 대해 주먹구구식 대응으로 일관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군대문화에 있다. R&R 설정의 목표는 개개인간의 업무의 명확한 분담이다. 이것을 통해 개인의 퍼포먼스 향상 -> 팀 전체의 퍼포먼스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업무를 '노오력' 해서 제시간에 끝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우린 마음대로 '퇴근'할 수 없다. 왜냐면 위아 더 월드, 우린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팀원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군대문화
한국회사들은 최고의 인재들을 똑같은 사고를 하는 로봇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군대가 좋으면 군인이 되면 될 일이다.(출처='MBC')
우리가 남이가?

자신의 업무를 다 했지만 당당하게 퇴근할 수 없고 다른 사람 업무도 눈치껏 봐줘야 하는 상황.(물론 '종종' 서로 도와줄 수는 있다.) 이런 상황들이 당연시 되고 만연해 있는데 R&R은 왜 설정하는걸까? 전혀 그 목적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걸 정하느라 마라톤 회의를 하는 대신 그 시간에 웹툰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한 '군대 문화'가 창의성으로 승부해야 하는 IT기업까지 꽉 잡고 놔줄줄 모르니 아쉽다는 생각만 든다. 1996년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20년이나 지난 2016년도에는 우리 이제 ''좀 되보도록 하자.